갑오동학혁명 이후 한국은 청·일전쟁으로 청나라의 예속을 벗어나면서 일본과 러시아의 세력이 한반도 안에서 각축전을 벌이는 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당시 일본에 외유하여 체류 중이던 의암성사는 노일전쟁이 일어날 것을 예감하고 그대로 앉아서 나라가 전쟁에 휘말려 망해 가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동학의 조직을 동원하여 먼저 정부를 개혁하는 동시에 개화혁신운동을 일으켜야 한다고 생각하고 이인숙으로 하여금 먼저 정부에 건의하여 정치를 개혁할 것을 호소하였습니다. 그러나 부패, 무능한 정부 당국은 나 라의 운명이 이에 달린 줄은 생각지도 않고 오히려 이 글을 올린 이인숙을 체포하려 했습니다. 포덕 45년(1904년) 2월에 드디어 노·일전쟁이 일어나자 의암성사는 사태가 급박함을 보고 동학의 간부들을 일본으로 불러 민회(民會)를 조직하도록 지시하였습니다. 본국에 돌아온 간부들은 민 회의 이름을 대동회(大同會)라 하고 비밀리에 각 지방에 조직을 펴나갔습니다.

이어 4월에 박인호, 홍병기 등이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의암성사에게 그 동안의 국내사정을 보고하자 의암성사는 이르기를 "그대들은 본국에 돌아가 도인으로 하여금 일제히 상투머리를 잘라 단발(斷髮)케 하라. 단발의 목적은 첫째, 세계 문명에 참여하는 표준이요, 단결을 굳게 하여 마음과 뜻을 일치케 하는 것이니, 우리가 단발을 한 후에라야 기대하는 일이 성공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이 지령에 따라 7월부터 「대동회」를 「중립회」로 명칭을 바꾸고 각 지방에 조직을 하려고 하였는데 이 때 관헌의 탄압이 극심하여 뜻대로 안 되었습니다. 일이 여의치 못하자 의암성사는 권동진, 오세창, 조희연 등과 상의하여 회명을 다시 「진보회」로 바꾸고 다음과 같은 강령을 발표 케 했습니다.

첫째, 황실을 존중하고 독립 기초를 공고히 할 것.
둘째, 정부를 개선할 것.
셋째, 군정 · 재정을 정리할 것.
넷째, 인민의 생명, 재산을 보호할 것.

이와 같은 강령을 발표하면서 종래의 산발적인 모임을 지양하여 백만 도인이 8월 30일 일시에 개회(開會) 궐기하도록 지령을 내렸습니다.
이리하여 전국 각지에서 일제히 단발흑의(斷髮黑衣)로써 죽음을 무릅쓰고 정부 개혁과 국정의 쇄신을 부르짖으니 당시 상투를 자른 사람이 하루 사이에 만명을 넘고 며칠 사이에 근 20만 명이 참가하여 전국 방방곡곡에 진보회의 깃발이 휘날리게 되었습니다. 당시 진보회는 360여 군에 지방조직을 설치하고 정계에 큰 바람을 일으키며 민폐 제거와 무명잡세 혁파, 나아가 부패한 정부를 탄핵하며 교육과 산업의 부흥 등을 주창하였습니다.

그러나 진보회의 정체가 과거 동학혁명을 주도했던 동학당의 후신이라는 것을 알게 된 정부는 당황한 나머지 군대를 출동시켜 진압하는 한편 일본군과 교섭하여 지난날 갑오년 때와 같은 동학 토벌의 움직임을 보였습니다.
그래서 각 지방에서는 충돌 사건이 빈발하고 발포, 구타, 살상 등의 공포 분위기가 조성되고 특히 평안도 태천에서는 수백 명의 교인이 한꺼번에 쫓기어 「고치강」에 빠져 익사당하는 비극이 벌 어지기도 했습니다.

한편 이 때 친일 단체인 「일진회」는 일본의 보호 밑에 겨우 간판만 유지하고 있었는데 「진보 회」가 크게 일어남을 보고 진보회장 이용구에게 「정부에서 갑오년 동학당 토벌 때와 같이 일본 군과 합세해서 진보회를 소탕할 방침인 듯하니 진보회가 살아남는 방법은 오직 일진회와 합동하 는 길뿐」이라고 유혹하였습니다. 이에 이용구는 동학을 배신하고 일진회 요구대로 이해 10월 13 일 「진보회」를 「일진회」와 합병, 친일 단체 「일진회」로 둔갑시켰습니다.
이용구의 배신을 뒤늦게 알게 된 의암성사는 포덕 46년(1905년) 12월 1일을 기해 동학을 천도교라 선포하는 동시 「천도교」와 「일진회」간의 일체 관계를 끊게 하고 이용구 등 친일파 일당을 천도교에서 출교 처분하였습니다. 갑진년의 이 개화혁신운동은 이용구의 배신으로 비록 좌절되었으나 우리 나라의 근대사에 있어서 놀라운 민권의 신장과 문화혁명의 개혁 의지를 보인 사건이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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