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도교는 정신 문화면에 치중한 민족 신문화 창달에 자못 눈부신 활동을 수행했습니다. 주로 3· 1운동 후 일어난 신문화 운동은 청년 운동·출판 문화 운동·농민 운동·어린이 운동·여성 운동 기타 여러 방면으로 전개되었는데 그 개요를 살피면 다음과 같습니다.

(청년 운동)

천도교는 3·1운동 후 교역자들이 대부분 체포·투옥당하여 한때 공백을 면치 못하였는데 이때 젊은 청년 교인들 중심으로 선열의 정신을 이어받아 새로운 진로를 모색하자는 논의가 활발히 진행되었습니다.
이리하여 민족의 신문화 창조·계발과 새로운 사상·교리의 연구 보급을 목적으로 청년교인 중심의 「천도교청년 교리강연부」가 포덕 60년(1919년) 9월 2일자로 발족되었습니다. 이 청년 조직은 전국 각지에 지부를 설치 확대하면서 다음해 3월에는 「천도교 청년회」로 이름을 바꾸고, 편집부 사업으로 「개벽사」를 설치하여 월간 「개벽」을 발간하는 한편 순회 강연을 실시하고, 또 체육부 사업으로 야구단을 조직 활동하였으며 신체조를 보급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포덕 63년에는 청년회 소년부사업으로 「천도교 소년회」를 조직하여 소년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그후 포덕 64년 9월에는 청년회를 발전적으로 해체하여 「천도교 청년당」의 창립을 보았습니다. 청년당은 급속도로 발전되어 포덕 66년에 지방당부 120여에 당원수 3만여 명을 확보하였고 7개 부문 운동을 전개하여 농민운동, 노동운동, 소년운동, 여성운동, 학생운동, 청년운동, 상민운동 등 각 계층 부문에 걸쳐 눈부신 활동을 전개하면서 매년 12월 1일을 포덕의 날로 정하여 계몽에 앞장섰습니다.
또한 청년당은 포덕 67년 5월부터 「신인간 자학(自學)」제도를 창설하였으며 포덕 68년 12월에는 「조선정형(情形)연구소」를 설치 운영하였습니다.
그 후 청년당은 포덕 72년(1931년) 2월 16일에 그 동안 별립해 왔던 「천도교 청년동맹」과 합동하여 「천도교 청우당」으로 개칭하여 더욱 활발한 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이리하여 포덕 73 년에는 당학(黨學) 제도를 창설했는데 다음해에는 이를 발전시켜 우리 나라 최초의 통신대학 강좌로서 「자수대학(自修大學)」강의를 실시하고 포덕 75년에는 기관지 「당성(黨聲)」을 통한 계몽교육에 힘썼습니다.

(개벽과 출판 문화 운동)

천도교는 3·1운동 이후 「개벽」지 발간을 비롯한 출판 ,문화 활동에 치중하여 당시 우리 나라의 출판문화 운동을 단연 주도해 나갔습니다.
「개벽」지는 포덕 61년(1920) 6월에 창간, 포덕 67년(1926) 8월까지 통권 72호를 내고 일제의 강압으로 폐간당하였습니다. 당시 잡지계의 왕자적 위치를 점한 「개벽」지의 발간 정신은 그 제호가 말하듯 천도교의 개벽 사상을 의미한 것이며, 천도교의 이념 구현에 뜻을 두면서도 종교적 색채를 나타내지 않고 사회 대중계몽에 주력하였습니다.
그리고 「개벽」지는 민중지로서의 특성을 보이고 민중을 위한 민중의 잡지임을 자처하였습니다. 또 한편 「개벽」지는 항일 민족 저항 잡지로서 수없이 많은 고난을 겪었습니다. 따라서 창간호가 압수당하여 임시호를 낸 것을 비롯, 발매 금지 34회 외 삭제, 벌금, 정간 등의 탄압이 잇따르고 초기 4년 동안 발행 권수 43만4천여권 중 무려 4분의 1에 해당되는 11만2천여 권이 압수당하 였습니다.
한편 개벽지의 성격은 종합 교양지이면서 문학지적 특성을 돋보이고 우리나라 근대문학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습니다.
「개벽」지가 포덕 67년 발행 금지를 당한후 「별건곤(別乾坤)」 (포덕 67∼75, 통권 103호),「혜성(彗星)」 (포덕 72, 통권 13호),「제 1선(第 1線)」 (포덕73, 통권11호) 등을 연이어 발간하고 이 밖에 「학생」 (포덕 70, 통권 12호),「중성(衆聲)」 (포덕 64, 통권 18호),「새벗」 (포덕 70, 통권 49호) 등 수많은 정기 간행물을 발행하였습니다. (어린이지와 여성지, 농민지 별도 간행)

(농민 운동)

천도교의 농민운동은 주로 포덕 66년 10월 29일 설립한 「조선농민사」를 통하여 전개되었습니다.
「조선농민사」는 처음에 「사우제(社友制)로 조직하였다가 포덕 69년 2월 14일 조직을 개편하여 중앙에 농민사 본부를 두고 각군에 군농민사와 그 밑에 이동(里洞) 농민사를 두는 계통 조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 후 각 지방 농민사는 포덕 69년 현재 23개였던 것이 포덕 74년에는 150여 개로 증가하였고 사원 또한 2O만 명에 달하였다고 합니다.
「조선농민사」는 우리나라 최초의 농민 잡지로서 「조선농민」(포덕 66∼71, 통권 30호)「농민 」 (포덕 71-74, 통권 42호) 등의 월간 잡지를 보급하는 한편 「대중독본」「대중산술」「비료제 조법」「양잠법」 등 농촌계몽 문고본을 보급하여 농업의 근대화에 주력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농민을 대상으로 한 잡지와 농촌 문고본의 보급은 당시 문화의 불모지였던 한국 농촌사회에 농민문화 보급의 선구적 계몽 역할을 다하고 버림받았던 농민의 인격 해방과 농촌의 경제적 파탄을 구제하는 농민의 의식적 각성을 촉구하는 한편 농민의 자주·근면과 협동 의식을 고취하고 나아가 민족적 자각을 일깨우는 동시에 과학 영농과 기술을 계도하고 일상 생활에서 비과학적 전근 대적 태도를 탈피하도록 합리적인 사고방식을 심어주었으며 농촌의 문맹 퇴치와 한글보급 등 크나큰 기여를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강연회 개최와 농민학교 및 야학(夜學) 운영에 앞장서서 전국에 3천여 개소에 달하는 「농민 야학」을 실시하고 또 「농민의 날」을 제창하여 농민의 권익옹호와 계몽에 이바지하였습니다.
그리고 「농민공생조합」을 포덕 72년에 별도로 조직하여 포덕 74년에 지방 공생조합의 수가 180 여개소에 조합원수 5만여명, 조합 총자본 30여만원에 달하였습니다. 특기할 것은 농민공생조합 평양 지부에서는 포덕 72년에 농민 고무신 공장을 설립, 매일 1,500 켤레의 고무신을 염가로 생산 공급하고 그 밖에 공동경작 운동을 전개하는 등 우리나라 농민주도의 민주적 농협운동의 원조가 되었습니다.

(어린이 운동)

천도교는 어린이 운동을 위하여 포덕 62년 5월 1일 「천도교 소년회」를 설립하고 전국 순회강연을 전개하여 유소년의 해방을 제창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음해 5월 1일에는 첫 「어린이날」행사를 하고 이를 범사회적 운동으로 확산하기 위하여 포덕 64년 4월 17일 다른 종교의 소년 단체와 연합하여 「조선소년운동협회」를 조직, 협회 본부를 천도교당 안에 설치하여 매해 5월 1 일을 「어린이날」로 선포하는 동시 세계 최초의 「어린이 헌장」이라 할 수 있는 「소년 운동의 기초조항」을 선포하였습니다. 한편 이 운동의 일환으로 「어린이」지를 월간으로 발간 보급하였는데 「어린이」지는 포덕 64년 (1923년) 3월 20일에 창간하여 포덕 75년 7월까지 통권 122호까지 내고 정간되었다가 해방 후 통권 137호를 끝으로 폐간되었습니다. 이 「어린이」지는 천도교의 인내천(人乃天) 사상을 바탕으로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 자유를 이념으로 하여 어린이를 민족 장래의 주인공으로 인식하고 어린이에 대한 재래의 비인간적 폐습을 혁신시키는 동시에 아동문학 창달에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여성 운동)

천도교의 인내천 사상은 교조의 시천주(侍天主) 및 사인여천(事人如天)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남녀동등권 사상을 내포하고 있는 만큼 여성 운동에 각별한 열의를 나타냈습니다.
천도교는 포덕 65년(1924년)에 「천도교 내수단(內修團)」이라는 이름으로 여성 단체를 조직하였는데 그 후 「내성단(內誠團)」「부인회」라는 이름으로 바뀌었으나 60여 년의 역사를 이어오고 있습니다.
그 동안 천도교의 여성 단체는 전국에 지방 조직을 두고 주로 생활혁신과 신여성상(新女性像)의 정립을 위해 많은 활동을 하는 한편 「부인」과 「신여성」이라는 월간 여성 잡지를 통하여 우리 나라 여성 운동의 선구적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부인」 잡지는 「내수단」이 조직되기 앞서 포덕 63년(1922년)부터 천도교 청년회 여성부문 운동의 일환으로 발간하기 시작하여 포덕 64년 9월까지 통권 16호를 발행하다가 그해 9월부터 「 신여성」으로 이름을 바꾸어 포덕 75년 8월까지 통권 38호를 발간하였습니다. (포덕 67년-포덕 71년까지는 별건곤에 통합)
「부인」지 또는 「신여성」지는 ①생활개선 ②가정의 낙원화 ③도덕과 미풍의 조장 ④자녀의 교양 ④고상한 취미 고조 등에 힘쓰고 낙후한 한국 여성의 교양을 높이고 사회 진출과 여권신장 및 의식 계발에 선도적 역할을 하였습니다.

(신교육 운동)

보수적 민족주의가 한학(漢學) 위주의 구학문에 집착하면서 선진 문물을 수용하는 신교육을 외세에 추종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고루한 태도를 보인 데 반하여 천도교의 진보적 민족주의는 신교육 운동에 누구보다도 앞장서는 열의를 보였습니다.
천도교 제3세교조 의암성사는 일본 망명시 64명의 국내 젊은이를 일본에 유학시킨 바 있고 「황성신문」(광무 10년 2월 14일자)에 「사손병희씨열의교육(謝孫秉熙氏熱意敎育)」이란 논설이 실린 것만 보아도 천도교가 신교육 운동에 얼마나 열성이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천도교는 보성학교(普成=현 보성중고등학교와 고려대학교)와 동덕(同德)여학교를 비롯하여 용산에 양영학교와 선덕여학교, 마포에 보창학교와 삼호보성소학교, 청파동에 문창보통학교, 청주에 종학학교, 안동에 봉양의숙, 선천에 보명학교, 전주에 창동학교, 대구 교남학교와 명신여학교 등 31개 학교 운영에 기여하고 전국적으로 야학 강습소를 통한 문맹퇴치 등 민중교육 내지 민족교육에 크게 공헌하였습니다.

(기타. 신문화 운동과 그 의의)

이상에서 천도교의 신문화 운동을 주로 청년 운동, 출판 문화 운동, 농민 운동, 어린이 운동, 여성 운동으로 나누어 개관해 보았으나 이 밖에 신인간 창조운동 그리고 언론 활동과 사상의 연찬과 그 전개에 많은 활동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신문화 운동의 특성과 그 의의를 살피면 다음과 같이 간추릴 수 있습니다.

첫째, 개벽사상을 배경으로 낡은 문화의 청산과 새로운 민족문화의 창조를 추구하여 낡은 사상과 제도와 인습에서 벗어나 새로운 가치관과 인간관의 정립으로 문화혁신을 도모하였습니다.
둘째, 「인내천」사상을 배경으로 한 인간 주체의 신문화 창조를 추구하여 인간이 물질이나 정신의 속박에서 벗어나도록 인간성 회복 내지 인격 해방에 앞장섰습니다. 따라서 전근대적인 봉건사상을 배격하고 배금주의에 빠지는 자본주의 내지는 유물사관의 사회주의를 다같이 부정하는 입장을 나타냈습니다.
셋째, 보국안민 사상을 배경으로 민족주의 성향을 지니고 민족 전통문화를 살리는 민족 주체성에 투철하면서 동시에 서구의 문물을 진취적으로 수용하는 입장을 나타냈습니다.
넷째, 민중을 대상으로 민중을 위하고 민중을 바탕으로 하는 민중문화 운동으로서의 특성을 나타냈습니다. nb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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