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을 주도한 천도교는 일제가 만주를 유린하고 중국 본토를 침략하기 위하여 우리 민족에게 더욱 가혹한 식민 통치를 심화시켜 나갈 때 일제의 패망과 독립을 기원하는 기도운동과 유사시에 대비한 자금을 모금하는 무인 독립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이 때 송죽과 같은 정절로 일관하여 온 천도교 제4세대도주 춘암상사는 포덕 77년(1936년) 8월 14일 교내의 주요 간부들을 불러 민족 정신의 회복과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일제의 패망을 기원하는 기도운동을 전개하도록 지령을 내렸습니다.

춘암상사는 간부들에게 일제의 패망이 가까워온다는 것을 말씀하면서 경전의 가르침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은 기도문을 아침·저녁 정성껏 기도하라고 밀령을 내린 것입니다.

"무궁한 내 조화로 개 같은 왜적놈을 일야간에 멸하고서 한의 원수까지 갚겠습니다."
이리하여 전국 각지에서 일제의 패망을 기원함과 아울러 유사시에 대비, 독립운동자금 마련을 위한 특별성금 모금이 비밀리에 진행되었습니다. 이 특성금은 중일전쟁이 일어난 후 이 전쟁으로 인하여 주권을 회복할 기회가 포착될 것으로 믿고 그 경우 필요한 자금을 미리 마련하기 위하 여 전국을 네개 구역으로 나누어 비밀히 모금 운동을 전개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운동의 후반에는 일본 경찰의 감시의 눈을 피하기 위하여 「일제 패망」이라는 문구 대신 「동양평화의 기초가 하루빨리 확립되도록 기원한다」는 내용으로 위장케 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포덕 79년(1938년) 무인년 2월 17일에 이 사실이 황해도 신천 경찰서에 적발되어 전국적으로 교역자의 검거 선풍이 일어났습니다. 황해도 연원 대표 홍순의에 이어 장로 최준모를 비롯하여 간부급 교역자들이 수백명 체포 투옥당하고 춘암상사는 노환으로 병상 심문에 그쳤으나, 투옥된 많은 교역자들은 혹독한 고문을 당하였습니다. 이 때 심한 고문으로 인하여 감옥에서 나오자마자 사망한 분이 장흥의 김재계, 논산의 손필규, 해남의 이강우, 신천의 김정삼 등 4명이나 되고, 그 밖의 여러분이 악형으로 인하여 고질병을 얻게 되었습니다.

당시 왜경은 수백명의 피검된 교역자들에게 일제의 패망을 기원하는 기도문을 여러 번 쓰게 하고 수십 번 혹은 백회 이상 종일 밤새도록 고성으로 낭독케 하였다고 합니다. 경찰서 안에서 일제 패망의 기도문 소리가 계속 울려 퍼지자 오히려 왜경들 스스로 놀라서 안색이 초췌해지고 검어졌다고 전합니다. 이것은 그들의 정신적 패망을 의미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일본 신문들은 「사변하에 지하활동」「극비의 불온계획」「조선독립을 몽상」「천도교의 대음모」「특별희사금도 모금」등의 제목으로 보도하였습니다.
그런데 당시 일제는 이 사건이 크게 확대가 될 경우 중일전쟁 수행에 불리하다고 판단하여 일반 교역자들은 모두 석방시키고 최준모, 김재계, 한순회, 김경함, 홍순의 등 5인만 구속 송치하였다가 5인마저 70일만에 석방하였습니다. 왜경이 이 사건의 성격과 죄질이 3·1운동 때보다 더한 대음모라고 하면서도 전원 석방으로 매듭짓게 된 것은 전시하에 미치는 중대한 영향의 충격파를 미연에 막으려는 고등 책략에서였던 것입니다.

이 무인 독립운동은 널리 알려지지 않고 역사의 그늘에 가리어 있었으나 우리나라 독립운동 역사상 가장 혹독했던 민족 수난기에 민족 말살의 위기에서 우리의 민족혼을 되살리고 불굴의 독립의지를 보였다는 점에서 그 의의는 매우 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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