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도교 제1세교조이신 수운대신사(水雲大神師)는 포덕전 36년(1824) 갑신 10월 28일 한국의 경주 근교 현곡면 가정리에서 탄생하시었습니다. 성은 최(崔)씨요 이름은 제우(濟愚)요 자(字)는 성묵 (性默)입니다. 대신사의 먼 조상은 신라 때 최치원으로 전해오고 있고, 아버지의 이름은 최옥(崔 )으로 근암공(近菴公)이라 불리었으며, 어머니는 한(韓)씨입니다. 대신사께서 탄생하실 때 천기가 매우 맑고 오색 구름이 집을 두르며 상서로운 향기가 하늘과 땅에 가득히 찼는데 집앞 구미산이 크게 사흘을 울었다고 전합니다.

대신사는 어려서부터 총명이 뛰어나고 얼굴이 수려하고 눈의 광채가 돋보였다고 합니다. 대신사께서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고 17세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이로부터 남달리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고 어지러운 세상을 건질 수 있는 참된 진리를 찾아 구도(求道)에 힘쓰게 되었습니다. 대신사는 어려서 이미 배웠던 유교의 여러 경서를 다시 한번 상고하여 보고, 불교를 탐구하여 보기도 하고, 또한 그 당시 서양으로부터 들어온 천주교의 서적을 읽어 보았으나 거기서 아무것도 얻지 못하여 기성종교로써 세상을 건질 수 없음을 개탄하였습니다.
이리하여 대신사는 천하를 두루 다니며 새로운 구도의 길에 나섰습니다. 그래서 혹은 음양과 복술의 글도 연구하여 보고 혹은 민속신앙 속의 주술을 탐구하기도 하고, 활쏘기와 말타기도 하며 장사도 하면서 여러 방면으로 사회 인심풍속을 살피고 조용히 생각을 가다듬어 묵상으로 구도에 힘썼습니다.

그러다가 31세 되는 해에 처자를 데리고 울산으로 가셨습니다. 그 이듬해 을묘년(1855) 봄 초당에 홀로 앉아 이치를 생각하고 있을 때 어떤 이상한 도인이 나타나 책 한권을 대신사에게 드리고 사라졌습니다. 이 책을 일러 을묘천서(乙卯天書)라고 하는데 유·불·선 기타 모든 글 가운데 없는 글이었습니다. 대신사는 마음을 가다듬고 그 글 끝에 '49일 기도를 하라'고 씌어 있는 내용에 따라 이를 단행하기로 하였습니다.

대신사는 33세 되는 병진년(1856) 여름에 49일 기도를 올리기 위하여 경상남도 양산의 천성산「내원암」으로 들어가 적멸굴(寂滅窟)에서 기도하기 47일 만에 문득 마음으로 숙부의 죽음을 직감하고 공부를 마치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왔더니 과연 숙부가 별세하여 상중(喪中)이었습니다. 이 일을 전해들은 사람들은 대신사를 이인 또는 도술에 통한 사람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다음해 가을에 대신사는 다시 천성산에 들어가 지성으로 기도를 올렸습니다. 그러나 불가사의한 이적(異跡)과 영험(靈驗)이 있을 뿐 세상을 건질 큰 도를 얻지 못함을 안타까와 하였습니다.

대신사는 스스로 생각하기를 당초에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잡고 도탄에 빠진 창생을 건질 큰 도를 얻기 위하여 집안일을 돌보지 아니하고 선조의 유산을 탕진하면서 20년 가까이 전국을 편답하였으나 이렇다할 소득이 없음을 한탄하고 크게 결심한 나머지 기미년(1859) 10월 고향인 경주 용담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이곳은 대신사 선조로부터 여러대 살던 곳이요 어려서 공부하던 옛터라 대신사는 큰 도를 얻기까지는 산밖에 나가지 않기로 맹세하고 제선(濟宣)이란 이름을 제우(濟愚)라고 고첬습니다. 이것은 어리석은 세상 사람을 건지겠다는 굳은 결심을 뜻합니다.

용담정에서 수련에 열중하던 37세 되는 경신년(포덕 원년 1860년) 4월 5일 대신사는 드디어 한울님의 계시(啓示)로 천도(天道)를 받았습니다. 이 때 대신사는 갑자기 마음과 몸이 떨리며 병이라 하여도 증세를 잡을 수 없고 말로도 형상하기 어려운 황흘한 경지에 이르러 흘연히 한울님의 계시를 받았습니다.

한울님이 말씀하시기를 「나의 영부를 받아 사람을 질병에서 건지고 나의 주문을 받아 사람을 가르치라」고 하였습니다.

이어 한울님께서 대신사에게 도를 내리시면서 말씀하시기를「나의 마음이 곧 네 마음이니라. 사람이 어찌 알 수 있으리오. 천지는 안다 하여도 귀신은 알지 못하였나니 귀신이라 함도 나니라. 너 에게 무궁 무궁의 도를 내리노니 갈고 닦고 다듬어서 글을 지어 사람을 가르치고 법을 바르게 하여 덕을 세상에 펴면 너 또한 장생하여 천하에 빛나게 되리라」 하였습니다.

대신사께서 이 말씀을 듣는 순간 갑자기 마음에 새 생각이 일어나 형언할 수 없는 신비의 체험 속에서 밝은 광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리하여 대신사 스스로 무극대도의 이치를 밝히고 온 누리에 포덕할 대법(大法)을 세우기 위해 주문(呪文)을 짓고 「용담가」「교훈가」「안심가」「검가」 등의 가사(歌詞)를 지었습니다. 이어 신유년에는 「포덕문 (布德文)」「몽중노소문답가」「도수사」 등을 펴내시고 6월부터 널리 포덕에 착수하였습니다.

포덕이 시작되자 날로 입도하는 사람이 늘어났습니다. 많은 사람이 입도하여 성황을 이루자 이를 음해하고 중상하며 심지어 서학(西學)으로 지목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대신사는 일시 지목을 피하여 11월에 고향을 떠나 여러 날 만에 전라도 남원에 이르러 「은적암」에서 도를 닦으면서 「 수덕문(修德文)」「권학가」 등을 지으셨습니다.

대신사는 다음해 포덕 3년(1862) 봄에 은적암으로부터 돌아와 그해 여름에 더욱 많은 포덕을 하였으며, 동학이 날로 늘어나자 관에서는 동학을 이단시하여 없애려고 하였습니다. 이에 대신사는 포덕한 지 4년째 되는 해(1863년) 8월 14일에 수제자인 최경상에게 도통을 전수하니 이로부터 해월신사가 천도교의 제2세 교조가 되셨습니다. 이해에 대신사는 「도덕가」와 「흥비가」와 「불연기연(不然其然)」과 「탄도유심급(歎道儒心急) 」 「필법(筆法)」 「팔절」 등을 비롯 많은 시구(詩句)를 지으셨습니다. 그후 대신사는 12월 10일에 관에 체포당하시여 다음해 포덕 5년(1864년) 갑자 3월 10일 대구장대에서 참수형을 당하여 순도 하셨습니다.

이로서 대신사의 육신은 사라졌으나 그 심법과 성령은 길이 살아 세상에 널리 전하게 되었습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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