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도교 제2세교조 해월신사(海月神師)는 포덕전 33년(1827) 3월 21일 경주 황오리에서 탄생하시었습니다. 성은 최(崔) 씨요 이름은 시형(時亨)이며, 아버지는 종수(宗秀)요 어머니는 배(裵)씨입니 다.

해월신사는 5세 때에 어머니를 여의고 12세 때에 아버지마저 돌아가시어, 이로부터 먼 일가에 몸을 의지하고. 소먹이고 방아 찧는 일에 종사하다가 16세 때에는 이웃집 머슴을 살았습니다. 신사께서 17세부터는 흥해(興海)제지소에서 일을 보았으며 28세 때 경주 신광면 마북동으로 이사하신 뒤 그 지방 사람들의 추대를 받아 풍강(風綱)이 되어 6년동안 마을 사람들에게 좋은 일을 많이 하여 송덕비(頌德碑)가 섰습니다.

신사께서 35세 되는 포덕 2년(1861년) 6월에 큰 뜻을 품고 동학에 입도하시여 지극한 정성으로 독공(篤工)하시고 다음해 3월 대신사로부터 포덕에 더욱 힘쓰라는 명교를 받아 영해·영덕·예천· 청도·울진·흥해 등 각지에 포덕을 하시고 접주제(接主制)를 시행하셨습니다.

신사께서 37세 되는 포덕 4년(1863년) 8월 14일에 대신사로부터 도의 종통을 승계받아 천도교의 제2세 교조가 되셨습니다.

신사는 대신사 순도 이후 태백산과 평해·울진·영양 등지로 숨어다니시며 교인들을 수습하고 동학을 재건하는 데 힘쓰시고 포덕 6년(1865년) 10월 28일 검곡에서 「사람은 이에 한울이니 평등으로 대하라」는 설법을 하시었습니다.

그리고 포덕 8년(1867년) 3월 10일에는 양천주(養天主)의 법설을 발표하셨습니다. 포덕 12년(1871 년) 3월에 이필제가 「신미의거(辛未義擧)」를 거사케 되어 동학에 대한 탄압이 극심하여 해월신사는 일월산으로 피신하셨다가 다시 소백산 깊은 산속 나무꾼의 발길도 닿지 않는 바위굴에서 굶주리며 피신했었습니다. 그후 영월 직곡리에서 49일간 특별기도를 행하고 각지의 동학 접주를 모이게 하여 대인접물(待人接物)에 관한 설법을 통해서 「사람을 한울같이 섬기라」는 사인여천(事人如天)의 가르침을 내리셨습니다. 해월신사는 포덕 16년(1875년) 8월에 정선에서 우상을 폐지하도록 강론하시고 이어 10월 28일에는 용시용활(用時用活)을 강조하시면서 경상(慶翔)이란 처음 이름을 시형(時亨)으로 고치시고 제자들도 때 시(時)자를 붙여 이름을 고치게 하셨습니다.

이어 포덕 21년(1880년) 6월에는 인제에서 동경대전(東經大全)을 간행하시고 다음해 6월에는 용담유사(龍潭遺詞)를 간행하셨습니다. 다시 포덕 23년(1882년) 2월에는 목천에서 동경대전을 출판하셨으며 다음 해에는 계미판(癸未版) 경전을 간행하시여 이를 널리 보급케 되면서 포덕이 날로 늘어났습니다.

그동안 해월신사는 계속 쫓겨다니면서도 가는 곳마다 과일나무를 심고 멍석을 짜고 짚신을 삼고 새끼를 꼬는 등 잠시도 쉬는 일이 없었습니다.

해월신사는 포덕 26년(1885년) 9월에 상주에서 한울님이 베를 짠다는 천주직포설(天主織布說)을 말씀하시면서 어린이나 부녀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을 한울님같이 섬기도록 강조하셨습니다. 그후 포덕 30년(1889년) 11월에 금산에서 아기를 포태하였을 때 지켜야 할 내칙(內則=胎敎)과 부녀신도의 일상생활 속에 닦아야 할 내수도문(內修道文)을 친히 지어 배포하셨습니다.

그 동안 동학의 교세는 충청도와 전라도에까지 크게 떨치게 되어 포덕 33년 10월에 제자들이 공주에서 대신사의 억울한 순도에 대하여 그 죄목을 사면하여 줄 것을 관찰사에게 청원케 되고 이어 다음해 해윌신사는 친히 전라도 삼례역에 도인 수천명을 모아 대신사신원운동(伸寃運動)을 전개하셨습니다. 그 후 포덕 34년(1893년) 2월에는 직접 중앙정부를 상대로 광화문 앞에서 상소 (上疏)운동을 전개하시고, 3월에는 보은에 2만여명의 도인이 모여 20여일간 대대적인 집단 시위를 감행하였는데, 이 때 동학은 대신사의 신원뿐 아니라 탐관오리의 제거와 외세(外勢)의 배격을 요구하고 나섰습니다.

이리하여 포덕 35년(1894년) 갑오년 초 드디어 호남에서 동학혁명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동학혁명 이후 해월신사는 강원도 흥천·인제 등을 전전하다가 원주의 치악산 깊은 산속에서 추운 겨울을 보내시고 다음해 2월초 쌓였던 눈이 녹자 충주를 거쳐 상주「높은터」와 청주, 여주 등지로 피신해 다니셨습니다.

포덕 38년(1897년) 4월 5일 해월신사께서 향아설위(向我設位)의 법설을 발표하시면서 「예로부터 제사지낼 때에 벽을 향하여 위(位)를 베풀어 왔으나 이제부터 각기 나를 향하여 베푸는 것이 옳다 」고 하시었습니다.

이밖에 해월신사의 법설은 수없이 많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평등사상」「양천주(養天主)」「 대인접물(待人接物)」「용시용활(用時用活)」「이천식천(以天食天)」「천어(天語)」「이심치심(以心治心)」「삼경설(三敬說 : 敬天·敬人·敬物)」「내수도문(內修道文)」「내칙(內則)」 그리고 한 울님이 베를 짠다는 「천주직포설(天主織布說)」과 「만유(萬有)의 시천주(侍天主)설」「물물천사사천(物物天事事天)」 등의 사상을 전개하여 어린이나 부녀자를 막론하고 일체 평등하게 대하도록 강조하셨습니다. 또한 「만사지(萬事知) 는 식일완(食一碗)이라」하여 모든 것이 밥 한 그룻에 달려 있음을 설파하고 「땅 아끼기를 어머니 살같이 하라」 하셨으며 「이기대전(理氣大全)」을 비롯한 수많은 법설을 남기셨습니다.

해월신사는 포덕 38년 12윌 24일 의암 손병희(孫秉熙)에게 도통을 전수하시고 포덕 39년(1898년) 4 월 5일 원주에서 체포되시어 6월 2일 72세로 서울에서 교수형을 받아 순도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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