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도교 제4세 대도주 춘암상사(春菴上師)는 포덕전 5년(1855년) 2월 1일 충남 덕산에서 탄생하시었습니다. 성은 박(朴)씨요 이름은 인호(寅浩)요 아버지 이름은 명구(命九)요 어머니는 방(方)씨입니다.

춘암상사는 빈농의 집안에 태어나 가난하게 자랐으나 아버지로부터 항상 「내가 이롭기 위해 남을 속이지 말며 무슨 일에나 정직하라」는 엄한 가르침을 받아 일평생을 정직으로 일관하시었습니다.

춘암상사는 포덕 24년(1883년) 29세 때 동학에 입도하시여 친히 해월신사의 가르침을 받아 도를 닦았습니다. 춘암상사는 의암성사와 함께 해월신사를 모시고 공주 가섭사(迦葉寺)에서 49일간 특별기도를 행하고 그후 10년 동안 의관을 풀지 아니하고 술과 담배와 고기, 생선까지 끊고 주경야독 (晝耕夜讀)으로 수도에 전념하셨는데, 논밭을 갈 때도 갓망건을 풀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렇게 독실하게 수도하면서 충청도 일대에서 널리 포덕에 힘썼습니다.

그후 포덕 34년(1893년) 대신사 신원운동에 덕의대접주(德義大接主)로서 많은 도인을 거느리고 앞장스셨고, 다음해 갑오동학혁명 때 춘암상사는 충청도 일대에서 약 5만명의 동학군을 통솔하여 참가하셨습니다.

동학혁명이 좌절당한 후 춘암상사는 흩어진 동학군을 다시 수습하려 하셨으나 막료조차 만날 수가 없어서 몸을 피하여 예산의 금오산(金烏山) 속에 토굴을 파고 추운 겨울을 지내며 후일을 기다렸습니다.

그후 의암성사가 해월신사의 뒤를 이어 천도교 제3세교조가 되신 뒤 춘암상사는 공주와 청양 사이의 정산말티(定山斗峰)라는 험준한 산속을 넘나들며 의암성사를 안전한 곳으로 모시는 데 정성을 다하셨습니다.

포덕 42년(1901년) 3월 의암성사가 해외로 장도길에 오르게 되자 춘암상사는 일본을 여러 차례 내왕하면서 국내 사정을 상세히 보고함과 아울러 성심으로 성사의 뜻을 받들었습니다. 춘암상사 는 포덕 46년(1905년) 12월에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다음해 1월 의암성사를 모시고 귀국하여 그 해 천도교 중앙총부를 창설할 때 고문과 경도사(敬道師)의 중임을 맡았습니다. 포덕 49년(1908년) 1월 18일 춘암상사는 의암성사로부터 대도주의 종통을 선수받아 천도교 제4세 대도주가 되셨습니다.

<선수문>

오호라 오교종직(吾敎宗職)이 기속단전(旣屬單傳)은 불용재의(不用再議)라 수연이나 제 4세 도주 김연국의 반형(反形)이 이구(已具)하니 종직을 불가이광(不可以曠)일세 사차도주(使次道主) 박인호(朴寅浩)로 승기임(陞其任)하노니 익면내직(益勉乃職)하여 무부차 영선지의(毋負此靈選至意)어다.

춘암상사는 대도주가 되신 후 천도교 중앙총부의 지도체제를 새롭게 갖추시고 교세확장에 힘을 기울이셨습니다.

그 후 나라의 운명이 기울어 경술국치를 당하게 되자 춘암상사는 통분의 정을 되씹으며 오직 은인자중 힘을 기르는 데 힘썼습니다.

일제 치하에서 모든 단체 활동이 금지당한 가운데 춘암상사는 의암성사를 모시고 성사의 뜻을 받들어 무엇보다 출판 문화와 교육 활동에 주력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천도교 중앙총부 부설로 인쇄출판사를 설치하고 또 월보과(月報課)를 신설하여 기관지를 발간 보급하는 한편 보성학교와 동덕여학교를 인수 경영할 때 춘암상사가 교주(校主)가 되어 민족교육에 앞장섰던 것입니다. 이 밖에 그때 천도교에서 경영한 학교가 수십에 이르고 학교 교육뿐만 아니라 사회 성인 교육에 더욱 열을 다하여 전국에 8백여의 교리강습소를 설치 운영하시고 서울에는 종합강습소를 설립하셨으며 야간 강습을 통해 민중교육에 앞장섰던 것입니다.

한편 천도교는 포덕 52년(1911년)부터 주문, 청수, 시일, 성미, 기도 등 오관(五款)을 수도의 요목으로 정하는 동시 우이동에 교역자의 수련장으로 봉황각을 새로 짓게 되었습니다. 그후 포덕 59년(1918년)에는 「교리연구부」를 설립하는 한편 서울 경운동 88번지에 1,824평의 터를 마련하여 중앙대교당을 건축 기공하면서 거교적으로 성금을 모았는데 이 성금이 바로 3·1운동 자금으로 쓰여졌습니다.

이어 포덕 60년(1919년) 1월 5일부터 49일간 거교적인 특별기도를 올렸는데 이것은 3·1운동의 정신적 자세를 확립하는 준비의 하나였습니다. 3·1운동 때 의암성사는 춘암상사로 하여금 민족 대표에서 빠지게 하여 뒤에 남아 교회일을 도맡아 보도록 배려하였으나 춘암상사 또한 48인의 한 분으로 체포당하시어 의암성사와 함께 옥고를 같이 치르게 되었습니다.

이리하여 3·1운동 후 교회는 간부급 교역자가 모두 체포당하여 한때 공백에 빠졌으며 청넌 교역자 중심으로 새로운 진로가 모색되었습니다. 옥고를 치르고 나온 춘암상사는 포덕 63년(1922) 의암성사께서 환원하시자 6월에 이르러 교내의 모든 일을 중의(衆議)에 맡기시고 정신적 지도에만 머물렀습니다,

그후 일제가 만주를 유린하고 다시 중국 본토에 대한 침략을 획책하면서 군국주의 통치를 심화하게 되자 포덕 77년(1936년) 8월 14일에 지방 두목을 불러 일제의 패망을 기원하는 특별기도 즉 무인독립기도운동을 전개하도록 하셨습니다.

그후 춘암상사는 일제의 가혹한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변함없는 성실과 정직으로 일관하시며 천도교를 지켜오시다가 포덕 81년(1940년) 4월 3일 향년 86세로 환원하셨습니다. 춘암상사는 오로지 「참」에 살고 한평생 「거짓말 하지 말라」하시며 진실을 추구하는 데 수범을 보이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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