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왜 교회에 나오는가?

사람은 스스로의 생각을 가지고 살아간다. 생각이 없이 산다면 길가에 서있는 장승이나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어떻게 살아야 바르게 사는 것일까?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옳은 행동이 될까? 이러한 오래된 인류의 의문에 답을 제시한 분들이 바로 성인이라 추앙받는 석가, 공자, 예수등이다. 그러나 그분들이 바른 삶에 대한 길을 제시하신지 2000 여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람들은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른 삶인지 혼란스러워 하며 살아가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145 년전 우리나라에도 이러한 근본 의문에 대해 크게 깨우치신 분이 있었으니 그 분이 바로 수운 대신사님이시다.

대신사께서 가르쳐 주신 바른 삶의 요체는 주문 21자에 모두 함축되어 있다. 21자 주문의 뜻은 타인과 내가 둘이 아니고 하나요, 자연과 내가 둘이 아니고 하나요, 천지간에 가득한 한울과 내가 둘이 아니고 하나인 이치를 오늘에 이르러 크게 깨닫고, 한울의 기운과 하나 됨으로써(지기금지원위대강) 한울님의 성령을 내 몸에 모시고 한울님의 덕과 한울님의 마음으로 살아가니(시천주조화정) 모든일을 행함에 있어 천도에 어그러짐이 없는 삶을 살아가게 된다(영세불망만사지)는 것이다.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 대해서 만족하지 못하는 것은 삶에 대한 근본을 잘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모든 만물들과 자신의 근본을 바르게 알게 됨으로서, 근본을 잘 몰라서 빚어지는 사회의 모든 부조리와 모순등을 바로 잡아 한울님 본래의 뜻을 온 세상에 바르게 펼쳐서 지상천국을 건설하고자 하는 것이 천도교를 신앙하는 목적이 되는 것이다.

2.대신사께서 무엇을 위해 어떤 구도행을 하셨나?

1824년 음력 10월28일 대신사님은 경주군 현곡면 가정리에서 태어나셨다. 경주 최씨인 근암공 최옥의 아들로 멀리 최치원 선생이 선조가 되신다. 근암공 최옥은 당대 영남학파의 저명한 유학자로서 소년시절의 학문적 수련기를 아버지의 훈도아래에서 보낸 대신사님은 무극대도의 사상적 원천의 한줄기를 조선의 완숙한 성리학으로 구성하게 된다. 또한 먼 선조인 최치원 선생의 도가사상 또한 크고 작은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근암공은 이때 이미 육십이 넘은 나이로 25세때 첫 번째 부인과 사별하고, 49세때 두 번째 부인과도 사별하여 혼자 지내다가 과부인 한씨부인을 특이한 인연으로 만나 대신사를 늦게 얻었으니 “착한운수 둘러놓고 포태지수 정해내어" 태어나신 것이다. 그러나 대신사는 어머니인 한씨부인이 당시 재가를 할수 없었던 재가녀였기 때문에 서자의 신분이 되었다.

대신사께선 “얼굴은 관옥이요 풍채는 두목지라. 그러그러 지내나니 오륙세 되었더라. 팔세에 입학해서 허다한 만권시서 무불통지 하여내니 생이지지 방불하다. 십세를 지내나니 총명은 사광이요 지국이 비범하고 재기 과인하니..." 하신 총명함이 있었고 학문이 뛰어난 아버지 밑에서 학업에 열중하여 만권시서를 무불통지하는 성과도 보였으나 개인적으론 서자요 가족적으론 10세에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17세에 아버지마저 돌아가시는 시련이 거듭된다. 20세때엔 큰 화재로 가산과 모든 유물이 불에 타버리고 말았다. “아버지의 평생사업은 불속에서 자취마저 없어지고 자손의 불초한 여한은 세상에서 낙심하게 되었노라. 어찌 슬프지 아니하며 어찌 애석치 아니하랴.”) 그리하여 대신사는 가솔은 울산 처가에 의탁한 후 암울한 사회상황과 개인적 가족적인 시련을 타개할 길을 찾아나서게 되니 이것이 10여년간의 주유천하이다.

“평생에 하는근심 효박한 이세상에 군불군 신불신과 부불부 자부자를 주소간 탄식하니 울울한 그회포는 흉중에 가득하되 아는사람 전혀없어 처자산업 다버리고 팔도강산 다밟아서 인심풍속 살펴보니 무가내라 할길없네..”(몽중노소문답가)

대신사는 자라면서 조선시대까지 우리민족의 마음을 지켜오던 유불선을 학습하시나, 뛰어난 학문에도 불구하고 향반으로 늙으신 아버지의 생애를 통해 체제의 부패와 불합리함을 느끼고 서자의 신분으로 소외당한 자신의 처지를 통해 사회제도의 모순을 느끼면서 성장하셨다.

주유천하에 나선 대신사의 마음 속엔 그래도 어디엔가 세상을 되살릴수 있는 생동하는 길이 있으리라고 믿고 방방곡곡 찾아 다녔으나 오히려 방황하는 세상인심만 확인했을 뿐이었다. “ 매관매직 세도자도 일심은 궁궁이요, 전곡쌓인 부첨지도 일심은 궁궁이요, 유리걸식 패가자도 일심은 궁궁이라,...혹은 궁궁촌 들어가고 혹은 만첩산중 들어가고 혹은 서학에 입도해서 각자위심 하는말이 내옳고 네그르지...”(몽중노소문답가)

주유천하하면서 대신사는 그동안 조선에 들어와 있던 서학을 비롯한 신학문에도 접하셨다.

“양학은 우리도와 같은듯하나 다름이 있고, 비는 것 같으나 실지가 없느니라. 그러나 운인즉 하나요 도인즉 같으나 이치인즉 아니니라.”(논학문) 그러나 10년이 넘게 세상을 두루 살펴본 후에 얻은 결론은 이 세상은 이미 구제할 수 없는 막다른 지경에 이르렀다고 보고 “무가내라 할길없네” 하신 것이다.

대신사의 고민은 어지러운 사회를 바로 잡아서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제하는 길을 찾고자 하는 것이었는데 대신사는 그 길을 어디에서 찾고자 하였을까?

동학이 창도되던 당시의 사회상황은 첫째, 기존의 사회지도이념으로서 역할을 해오던 유교적 사회체계가 조선말에 이르러 더 이상 발전의 동력을 잃고 외부세계의 발전도 수용못하면서 붕괴되기 시작한다. 둘째, 이로인해 유교적 도덕정치대신 기득권만을 지키기 위한 세도정치와 부패로 일반민중들의 생활이 붕괴되면서 민란이 속출했고, 셋째, 혼란에 빠진 민중들이 새로운 사회의 지도이념을 찾아 혼란에 빠진사이 도참설등의 미신이 유행했고, 넷째, 그과정에서 유입된 서학이 기존 조선사회의 해체를 가속화 시켰다. 특히 서학의 영향은 군주제 사회에서 신성시 되오던 임금의 권위를 부정하고 천주의 권위를 위에 두었으며, 모든 교도는 천주의 아들딸로 평등하다고 하여 조선사회를 지탱해온 신분제도를 부정하였고, 황사영백서에서 보듯이 종교의 자유를 위해선 국가를 부정하기까지 하였다. 다섯째, 조선말이후 정체에 빠진 동양에 비해, 산업혁명이후 폭발적으로 증가한 상품생산능력으로, 원료를 조달하고 상품을 소비시킬 식민지개척에 나선 서양제국주의 국가들이 동양제국을 식민지화하기위해 서학과 무력으로 침탈해 들어오고 있었다.

3.을묘천서의 의미와 구도과정에서의 위치

1854년 10월, 대신사 나이 31세에 출가구도의 고행을 마치시고 울산의 가족들을 만나 처가에서 멀지않은 울산 유곡동의 ‘여시바윗골’에 초옥을 짓고 논밭을 마련하여 정착수련을 시작한다. “ 아셔시라 아셔시라 팔도구경 다던지고 고향에나 돌아가서 백가시서 외워보세”(몽중노소문답가) 즉 10년간 세상을 살핀결과 “십이제국 괴질운수 다시개벽” 해야하며 “태평성세 다시정해 국태민안” 할수 있는 새길은 스스로가 모색해야 되겠다는 결단을 내린 것이다.

이듬해 을묘년(1855) 3월3일에 대신사께서 홀로 공부하고 계실 때 이인이 나타나서 “소생은 금강산 유점사에서 백일기도를 하고 책 한권을 얻었는데 도저히 글 뜻을 알 수가 없어서 이 글 뜻을 아는 사람을 찾기위해 천하를 돌아다니는 중입니다.” 하면서 책 한권을 두고 가니 그 글 가운데 ‘지극한 정성으로 한울님께 49일 기도를 드리라’는 뜻이 있으므로 그대로 실천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33세 되던 해 여름에 양산의 천성산 통도사 내원암에 들어가서 49일 기도를 드리는데 47일 되던날 숙부께서 환원하는 형상을 보시고 하산하여 경주로 돌아가는 일이 있었다. 다음해 다시 49일 기도를 완성할 생각으로 내원암 부근 적멸굴에 들어가 49일 기도를 마치셨다.

을묘년에 하늘에서 책을 받았다 하여 ‘을묘천서’라고 불리는 이사건은 대신사 구도과정이 바뀌는 분수령이 된다. 이전까지는 주유천하가 상징하듯이 기존의 학문이나 종교들에서 광제창생의 해답을 구하고자 했으나 이후에는 스스로가 한울님께 기도하고 수행하는 단계로 전환되었다. 주유천하동안 습득했던 지식들이 내면화되는 단계로 볼 수도 있고 아무리 뛰어난 학문이나 종교라도 스스로의 수행과 실천이 없이는 아무것도 이룰수 없다는 자각일수 도 있겠다.

4. 대신사의 득도

대신사는 포덕전 1년(1859) 10월에 처자를 데리고 고향인 경주로 돌아와 선친이 지은 용담정에 은거하면서 ‘不出山外’의 글을 써 붙여 득도에 대한 강한 결심을 하신다. 아울러 이름 ‘濟宣’을 ‘濟愚’로 고쳐 백성구제의 뜻을 표현하셨다. 이듬해 입춘에는 ‘道氣長存邪不入 世間衆人不同歸’라는 입춘시를 써 붙이고 하루 세 번(자, 인, 오) 청수를 모시고 수행을 계속하셨다.

대신사 나이 37세되던 포덕1년(1860,庚申) 4월5일, 아침에 조카의 생일에 갔다가 심신이 이상하여 용담정으로 돌아온 오전 11시경에 한울님 마음과 하나가 되는 강령을 체험하신다.

“마음이 선뜩해지고 몸이 떨려서 무슨 병인지 집증할수도 없고 말로 형상하기도 어려울 즈음에 신선의 말씀이 문득 들리므로 놀라 물은즉 ‘두려워 말고 두려워말라 세상 사람이 나를 상제라 이르거늘 너는 상제를 알지 못하느냐?’...‘너를 세상에 내어 사람에게 이 법을 가르치게 하니 의심하지 말라... 나에게 영부 있으니 그 이름은 선약이요, 그 형상은 태극이요, 또 형상은 궁궁이니, 나의 영부를 받아 사람을 질병에서 건지고 나의 주문을 받아 사람을 가르치면 덕을 천하에 펴리라.’” (포덕문) 한울을 마음밖에 두고 지극히 정성을 다하여 도를 얻는 순간이었다.

한울님과 대신사의 문답(天師問答)은 다음해 봄까지 1년동안 계속되었다. 그동안의 문답중에는 한울님께서 대신사에게 금력, 권력, 권모술수를 주어 천하를 다스리게 하겠다는 제의를 대신사께서 물리치시는 일화가 들어있다. 아마도 마음공부의 단계중 세상의 모든이치가 꿰뚫어 보여 “밝지 아니한 곳이 없고 알지 못할곳이 없는” 허광심력의 단계를 체험하신 듯 하다. 대신사께선 이러한 조화와 술법의 신통력도 근본이치가 아니라 믿고 정진을 계속하여 드디어 밖에만 계시는 한울님이 아닌 "吾心卽汝心"(논학문)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한울을 마음밖에 두는 것은 侍天主의 전단계. 이후 천사문답도 같은 단계로 1년간 수행하고 체행하는 동안 한울님 마음과 대신사의 마음이 둘이 아닌 하나가 되는 侍天主 즉 吾心卽汝心의 경지에 이르신다.

마음공부의 시작은 밖의 한울님을 기원하며 그동안 내 안의 습관된 마음이 버려지는 것을 체험하면서 수행한다. 점차 사심이 사라진 맑은 마음이 되면서 그러한 자기 본래 마음이 곧 한울님 마음임을 깨닫게 된다.

강령체험이란 나의 마음이 천지간에 가득한 한울님의 큰기운(至氣)과 교통하는 순간을 체험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강령은 각 개인의 마음상태와 경험등에 따라서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다.

5. 포덕의 시작

대신사께서 경신년 4월5일 천도를 대각하신후 1년동안 수련을 계속하시면서 주문과 축문, 포덕식, 입도식등의 절차를 정했다. 그리고 주유천하당시 대신사를 대신해 가족을 돌보느라 고생이 막심했던 부인에게 가장 먼저 도를 간곡히 권하여 포덕을 하고, 데리고 있던 여종 두사람을 한사람은 며느리로 삼고 한사람은 수양딸로 삼았다. 이렇게 가정포덕을 먼저 한뒤 포덕2년(1861,辛酉) 6월2일 용담의 문을 활짝 열고 모여드는 사람들에게 도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 포덕할 마음은 두지 않고 지극히 치성할 일만 생각하였노라. 그렇게 미루어 다시 신유년을 만나니, 때는 유월이요 절기는 여름이라. 좋은 벗들이 자리에 가득함에 먼저 도 닦는 법을 정하고, 어진 선비들이 나에게 물음에 또한 포덕을 권하니라.... 문을 열고 손님을 맞으니 그 수효가 그럴듯하며, 자리를 펴고 법을 베푸니 그 재미가 그럴 듯 하도다.”(수덕문) 이때 모든 제자들에게 出入起居에 ‘告天’할 것과 하루 세 번(자, 인, 오) 청수 모시는 법을 가르치셨다. 또한 친히 목검을 들고 검무를 추시고 또 가르치기도 하셨다.

이렇듯 기록에 의하면 초기 동학의 수행법은 주문을 읽는것과, 심고하는 것, 경전을 음미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는데 그중에 검가와 검무가 심신의 단련에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이때 많은 사람이 입도하였는데 그중에 한사람이 최경상이다.

6. 접주제의 창시와 도통전수

포덕 3년 3월에 대신사께서 은적암에서 경주로 돌아오시니 더욱 많은 포덕이 되었는데, 경주 인근은 물론 경상도 일대와 전라도에서도 찾아와 입도하는 사람이 끊이지 않았다. 결국 경주부에서 이를 주시하다가 대신사를 체포하는데, 이소식을 듣고 모여든 수백명의 도인들의 압력에 굴복해서 석방하였다. 대신사께서 관의 지목을 피하기 위해 박대여의 집에서 용담정으로 다시 흥해의 손봉조의 집등으로 옮겨다니며 제자들을 지도하시다가, 늘어가는 도인들을 보다 효과적으로 바르게 인도하기 위해 각지의 우수한 도인을 뽑아 도인들의 관리와 교화를 담당하게 하니 이것이 접주제의 시작이요 교회조직의 처음이었다. 이때 16지역의 접주를 임명하는데 그중 검곡접주가 최경상이다.

이렇게 접주제를 시행한 후엔 이리저리 피해 다니시는 행각을 그만두시고 용담정으로 돌아와 본격적인 도인지도를 시작하니, 포덕4년(1863년) 7월에 접을 열고(開接) 각지의 접주들이 인솔해온 수십명씩의 도인들을 지도했다. 7월 23일 파접하는날 최경상에게 北道主人을 임명하였다. 이때 이미 대신사께선 체포후의 도에 대한 후계체계를 염두에 두신 것이다. 8월13일 최경상이 대신사와 함께 추석을 지내기위해 용담정에 찾아왔다. 대신사께서 주위를 물린뒤 최경상과 마주앉고 “ 수족을 마음대로 움직여 보라”하였으나 최경상은 말도 할 수 없고 수족도 움직일수 없어 그까닭을 묻자 “ 내 마음이 네 마음이요 내 기운이 네 기운인지라, 이는 곧 천지만물이 한 至氣로 화생한 증거라”하시었다. 다음날 8월 14일 “龍潭水流四海源 劒岳人在一片心”이란 글을 주시며 최경상에게 도통을 전수하시니 心法傳授가 이루어진 것이다.

7. 해월신사

해월신사(최시형)께선 1827년(순조 27년) 3월 21일 경주 동촌 황오리(현재 경주시 황오동)에서 태어나셨다. 신사께서 5세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12세때 아버지 마저 돌아가시어 먼 친척에 의탁하여 지내시다 17세때 제지소에 들어가 일을 하게 된다. 19세에 밀양 손씨를 부인으로 맞아 경주 신광면 마북동에서 사셨는데 평소의 공명정대한 생활로 마을사람들의 신망을 받아 집강(오늘날의 이장)소임을 하셨다. 고아가 되어 떠돌아 다니던 신세로 이 정도의 자립과 중망을 얻었다는 것은 신사의 근면함과 성실함이 남달리 뛰어났다는 것을 말해준다. 33세때 검곡으로 이사하시고 35세(신유년)에 대신사께 도를 받으셨다.

신사께서 도에 드신 후에는 매달 서너차례씩 검곡에서 용담정으로 대신사를 찾아 도를 배우는데 게을리하지 않고 집에서도 독실하게 도를 닦았다. 그러던중 신사께서 ‘대신사께서 독공하실 때 한울님 말씀을 들었다 하시니 성력을 다하여 한울님 마음을 움직이리라’ 마음 먹고 한겨울 혹한에 매일 목욕제계를 하였다. 이렇게 몇 달을 하더니 문득 공중에서 “찬물에 갑자기 앉는 것은 몸에 해로우니라”하는 소리가 들리므로 이상히 여겨 냉수욕을 끊었다. 그뒤 대신사께 이 일을 말씀드리니 대신사께서 “그대가 한울님 말씀을 들은 시간은 내가 수덕문을 읊던 시간이니, 수덕문가운데 ‘陽身所害는 又寒泉之急坐니라’하는 구절이 있어 나의 글읽는 소리가 그대에게 들린것이다.”하셨다. 오심즉여심의 체험을 하신 것이다. 이후 신사께선 지극한 정성으로 수도에 전념하시어 많은 이적을 남기셨고 또한 많은 포덕을 하시어 검악포덕이라고 널리 알려졌다.

8. 대신사의 순도

포덕4년(1863) 10월28일 대신사 탄신일에 많은 도인들이 모였다. 이때 대신사께서 “후세 사람들이 나를 天皇氏라 이르리라”하시니 후천 오만년의 시조가 되심을 분명히 말씀하신 것이다.

제자들이, 조정에서 이단으로 몰아 체포하려 하니 몸을 피하시라 권하였다. 대신사께선 “은적암으로 피할때는 제군들이 毛羽未成한 때였고 대도의 주인을 정하지 못하여 그리했으나, 이제 최해월로 주인을 정했으니 무엇을 꺼려 몸을 피하겠는가?”하셨다.

12월10일 대신사께선 중앙정부의 영으로 체포되어 과천까지 압송되셨다가 철종의 승하로 다시 대구로 내려가는 도중 조령에서 대신사를 구하기 위해 모인 수천의 도인과 만나 이들에게 설법하시었다. “ 너희들은 폭력으로 나를 구하려 하느냐? 천도가 폭력으로 만물을 성장케 하더냐? 너희들은 나의 육신을 구하려 하느냐, 나의 성령을 구하려 하느냐? 너희들이 진실로 나를 구하려 하면 성령과 도덕을 믿으라. 나는 결코 죽지 않는다. 천명대로 좇을 뿐이니 천명을 믿거든 돌아가 수도에 힘쓰라.” 문도중 한 사람이 “천명이 어찌하여 선생을 곤경에 빠지게 하였습니까?”하니 “ 천명은 생사를 초월한 것이니 무엇을 걱정하리오. 내 항상 무궁한 이울 속에 무궁한 내 아니냐고 하지 않던가. 이 죽지 않는 이치를 진실로 깨달으라. 그리고 이 도를 널리 세상에 전하라” 하셨다.

포덕 5년(1864) 1월 대구감영에서 심문이 진행되었는데 핵심은 ‘검’이었다. “도로써 세상을 가르친다 하면서 목검을 만들어 사용하고 제자에게 가르쳤으니 무슨 의미로 한 것이냐?”물으니 “ 도를 닦는 것은 천심을 지키고 정기를 양하는 것이라. 정기를 양하기 위하여 검무를 추게 한 것이요 다른 뜻이 없다.”고 답하셨다.

해월신사께서 대신사께서 대구옥에 계시다는 소식을 듣고 옥리를 매수하고 3월3일 저녁 9시경에 옥중으로 들어가 만나 뵈었다. 이때 대신사께서 담뱃대 속에 ‘燈明水上無嫌隙 柱似枯形力有餘, 吾順受天命 汝高飛遠走’ 란 글귀를 주시니 신사께선 곧 강원도 태백산으로 몸을 피하셨다.

포덕5년(1864년) 3월 10일 순도하시니 대신사 나이 41세였다. 참형당한지 3일후에 제자 김경필등이 시신을 거두어 구미산밑 용담정앞 산에 매장하였다.

9. 청수

포덕16년(1875) 8월에 신사께서 정선지방을 巡接하시다가 도인들이 소를 잡고 특별치성식을 거행하려 하므로 다음과 같이 설법하셨다. “ 대신사께서 포덕하시던 처음에는 제물로 소, 양, 돼지고기등을 통용하였으나 이는 아직 시대의 환경과 인심이 깨이지 못한 때문에 부득이 하였으나 이제부터는 일체 의식에 청수 한그릇만 사용하라. 물은 그성질이 맑고 움직이는 것이며 또 어느 곳에나 있지 않은 곳이 없는지라, 참으로 만물의 근원이라 이를 것이니 내 이로서 의식의 표준물로 정하노라.” 이해 10월에 用時用活을 설법하시고 본명 慶翔을 時亨으로 고치고 강수는 강시원으로 유인상은 유시헌으로 여러 제자들의 이름을 時자를 넣어 고쳐 주시었다.

10. 경전간행

포덕 20년(1879) 11월 신사께서 대신사 경전 편집소를 인제군 방시학의 집에 설치하고 인쇄를 위하여 편집 정리하셨고 포덕21년(1880) 5월 경전간행소를 인제군 남면 갑둔리 김현수의 집에 설치하고 <동경대전>을 간행하였다. 포덕 22년(1881) 6월에 다시 간행소를 단양군 남면 여규덕의 집에 개설하고 <용담유사>를 간행하였다. 이해 10월에 신사께서 告天式을 행한후 제자들에게 ‘7년간의 어육주초 금한것’을 해금하셨다. 포덕 24년(1883)2월에 경전간행소를 충청도 목천군에 설치하고 동경대전 천여부를 간행하여 각포에 분포하였다. 그해 여름에 다시 동경대전 경주판을 간행하여 포덕이 날로 늘어났다.

포덕 24년 3월에 손병희, 손천민, 박인호등이 신사를 찾아 뵈니 신사께서 독공등의 설법을 행하셨다. 이때 손병희가 도통하는 방법을 물으니 “도통하는 방법도 사람에 따라 다르니라. 그대는 우선 매일 짚신 두켤레씩 삼으며 주문을 하루 3만독씩 3년 한정하고 외우라” 하셨다.

포덕25년(1884) 10월에 신사께서 손병희,박인호등을 데리고 공주 가섭사에 가서 49일 기도를 행하시고 강서를 쓰셨다. 이때 신사께선 필요한 물품의 운반이나 힘든 일을 모두 손병희에게만 시키셨다. 심지어 밥솥을 걸게 하셨는데 일곱 번이나 새로 고쳐 걸게 하는등 힘든 일을 시켰으나 손병희는 조금도 싫어하는 기색이 없이 일일이 명하는대로 하였다. 이것은 신사께서 손병희의 근기와 심주를 시험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해 10월에 6임제를 설치하니, 교장, 교수, 도집, 집강, 대정, 중정, 이 여섯 부서에 각각 교무를 분담케 하는 제도였다. 이는 신사의 포덕과 경전의 간행등으로 신도가 크게 늘자 체계적인 교화를 위해 포,접의 조직아래 교무를 담당하는 직제를 만든 것으로 이렇게 체계화된 조직이 동학혁명때 큰 역할을 하게 된다.

11. 통유문

포덕 32년(1891) 신사께서 “세상이 점점 쇠미하고 운수가 막히매 도가 또한 희미하고 와전되어 도를 전하는 자 마음이 밝지 못하고 ... 난법난도를 행하니... 다음과 같은 임사실천십개조를 반포하노니 정성껏 지키어 어기지 말라.”며 임사실천 십개조를 반포하셨다.

포덕 33년(1892) 1월에 각포 도인들에게 경전을 소중히 하라는 통유문을 발하였다. 일부를 살펴보면

1. 도유가 동경대전과 가사를 열람할 때 혹 누워서 보는 자도 있으며 몸을 기울이고 외는 자도 있으며 혹 먼지 쌓인 광우리에 버려두기도 하니 한울을 무시하고 스승을 업신여김이 어찌 차마 이와 같으랴. 경전은 접주의 집 정결한 곳에 받들어 두었다가 강의를 들을때는 예복을 입고 병풍과 탁자를 베풀고 분향 사배한 후에 꿇어 앉아 가르침을 받을 것.

1. 교도끼리 서로 시비하여 따지는 폐단은 오로지 교권을 잡자는데 있으니 ... 욕심을 끊어 버리고 참된데로 돌아갈 것.’

포덕 33년 1월25일 魚肉酒煙을 금하는 통유문을 발하셨다.

날마다 행하는 음식, 의복이라도 감히 조금도 소홀히 못할 것이라. 어육주연은 천성을 잃어버리고 참된 근원을 없애는 것이요, 의복이 사치하면 도 닦는자 ... 검소해야 하는 경계에 어긋나는 일이라. 어찌 적은 일부터 미리 막아 위생을 돕고 검소한 덕풍을 이루게 하지 아니하랴.

1. 어육주연 네가지 물품은 도를 배우는 사람의 영양상 유해무익한 것이니 일체 엄금할 것.

12. 의암성사와 도통전수

갑오년이후 동학을 소탕하기 위한 검색이 전국적으로 매우 심하여 신사님과 모든 도인들의 고초가 막심하였다. 포덕 37년(1896)1월5일에 신사께서 손병희에게 “그대의 절의는 천하에 미칠 자 없다”하시면서 義菴이라는 도호를 내리시고 청주, 충주등지를 순회하며 도심을 수습케 하셨다. 1월 11일에는 손천민에게 松菴, 김연국에게 龜菴이라는 도호를 주시고 의암과 함께 삼인을 불러 “세사람이 마음을 합하면 천하가 이 도를 흔들고자 하여도 어찌하지 못하리라”하셨다.

포덕 38년(1897)4월5일 창도기념식에 신사께서 향아설위를 설법하시고 향아설위로 의식을 행하셨다.

포덕 38년 12월24일 신사께서 의암에게 도통을 전수하셨다.

의암성사는 포덕 2년 4월8일에 청주에서 손의조의 서자로 태어나셨다. 어려서부터 기개가 대범하고 작은일에 얽매이지 않았으나 어지러운 세상과 반상의 불평등을 타파할 뜻을 지니고 있던중, 청주 이방으로 있으면서 동학에 입도하여 수도와 포덕을 지극히 하던 당질 손천민에게 도를 전해듣고 포덕 23년(1882) 10월에 입도하셨다.

포덕 39년(1898)4월5일 신사께서 원주에서 체포되시어 서울로 압송되셨다. 6월2일 한성감옥에서 교수형을 받아 순도하시니 향년 72세였다. 의암성사께서 이종훈등과 시신을 수습하여 경기도 광주에 장례지내셨다.

13. 동학에서 천도교로 : 현도

창도이래 “東學軍 逢則殺之 殺之無罪”라는 영까지 전할정도로 혹심한 탄압으로 주문, 청수는 고사하고 심고조차 사람보는 데서 못하던교인들은 해월신사 순도이후 포덕 41년 한해에만 각지에서 순도한 교인이 수천에 이를 정도로 혹심한 관의 탄압에 시달렸다. 그 와중에서 흐트러진 도심을 불러 일으키고 도와 조선민중의 새로운 앞길을 모색하기위한 성사님의 치열한 노력과 모색이 전개되었다.

그 일환으로 성사께서 동학혁명당시 국제정세에 어두워 실패했던 교훈을 바탕으로 보국안민을 위한 세계정세를 살피기 위해 일본과 중국등지를 외유하시고, 민주적으로 개화된 외국의 모습을 분석하신후 앞으로의 국가, 민족간 싸움은 무기가 아닌 보다 깨어있는 민중에 의해 가늠될 것임을 갈파하셨다.

포덕 45년(1904) 러일전쟁이 시작되었다. 성사께서는 조선이라는 먹이를 두고 서로 싸우는 러일전쟁의 위기 속에서 조선의 자주적 개혁만이 방향이라고 판단하시고 도인들에게 진보회를 조직하고 일제히 黑衣,斷髮하여 궐기하게 하였는데 국내에서 이를 진두지휘한 이가 이용구였다. 이때 관에서 진보회의 배후가 동학임을 알게되어 탄압을 시작하니 그동안 은도해오던 동학으로선 진보회로 모든 조직이 노출되어 일대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때 독립협회의 잔당이던 윤시병등이 일진회를 조직하고 일본군의 보호하에 명맥을 유지하다가 진보회가 크게 일어남을 보고 일진회와 합류할 것을 제안하였는데 탄압에 직면한 이용구가 이를 받아들이게 된다. 포덕46년(1905) 일본이 러일전쟁에 승리하자 이용구, 송병준등이 일진회의 이름으로 우리나라가 일본의 보호를 받는일에 찬성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이에 성사께서는 일진회와 결별하고 교인들을 수습하기 위해 현도를 결심하신다.

포덕 46년(1905) 12월1일 동학을 천도교라 이름하고 이를 당시 제국신문 첫머리에 게재된 것을 비롯해 15회 반복 개제 되었다. 천도교란 이름은 대신사께서 ‘학즉동학이요 도즉천도’라고 한데서 연유한 것이다. 이로서 40여년동안 숨어서 신앙활동을 하던 도인들의 염원이 이루어 지게 된 것이다. 현도의 목적은 당시의 심한 동학 탄압하에서 공식적인 종교조직으로 변신하여 탄압을 피하고자 하였고, 교단조직을 근대화 하기 위해 대헌을 발표하고 교구를 설치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인위적 교단운영에서 체계적 운영으로, 점조직이고 사적인 포덕교화 방식에서 공식적이고 집단적인 포덕 교화방식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14. 오관실행

포덕 50년 12월 18일 의암성사께서 종령 제 91호로 기존에 실행해오던 오관을 일반교인들이 절대실행할 종규로 확정공포하는 동시에 그 실행세칙을 시달하였다. 그 시행세칙을 보면

1. 주문은 어느때 어디서든지 항상 외워 한울님과 양위 신사의 감응하시는 기운을 받아 사사로운 욕심과 망녕된 생각을 버리게 함.

2. 청수는 매일 하오9시에 받들어 집안 정결한 곳에 정한 그릇으로 모시어 한울님과 스승님의 감응을 받아 포덕천하 광제창생할 것을 먼저 축원하고 그 밖에 다른 소원을 축원함이 가함.

3. 성미는 가내식구를 위하여 영원한 수복을 비는 것이니 매양 밥쌀중에서 매식구에 한술씩 뜨되 지극한 정성으로 함.

4. 시일은 일요일마다 성화회에 참석하여 교인된 자격을 발표하는 것이니 아무쪼록 교당이나 전교실에 나가서 한울님과 스승님을 지성으로 생각하고 설교하는 말씀을 자세히 들으며 교리를 공부함.

5. 기도는 통상기도와 특별기도가 있는데 통상기도는 매시일 하오9시에 청수와 정미 5합을 같이 봉전하고 신사주문 백오회를 현송또는 묵송하며, 특별기도는 7일, 21일, 49일, 105일 등 일정한 기간을 정해가지고 봉행하는 것인데 총부에서 전체적으로 실시하는 절차에 의해서도 행하고 또는 한울님과 스승님의 감응을 받아 소원을 성취하기 위하여 각자 봉행하기도 한다.

포덕 53년 4월15일부터 포덕55년 3월25일까지 3년동안 7차에 걸쳐 의암성사 지도하에 전국의 두목들을 우이동 봉황각에서 차례로 독공시켰는데 수련 총일수가 343일이요, 참가두목이 총 483명이었다.

이때 5회 연성중 오관에 대해 말씀하신 것을 보면, “ 오관중 주문, 청수, 시일, 기도는 정신적 정성이요, 성미는 물질적 정성이기 때문에 풀뿌리와 나무껍질이라도 각자 먹는 그대로 매 끼니 때마다 거짓없이 떠서 소속교구에 바쳐야한다.... 세상사람들은 가치없는 물건으로 생각하기 쉬우나 한울님께 드리는 정성은 같은 것이다....특히 시일기도는 특별 獻誠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청수와 같이 정미오합을 모시는 것인데, 기도하는 정성은 소나 양 천마리보다 깨끗한 쌀 한홉이 더 나은 것이니라.... 내가 기도미제도를 실시하기는 포덕 52년이었지만 54년에 와서야 오관제도가 완성되었으니 나로서 가르칠 것은 다 가르쳤다. ... 포덕 54년 이전에 교인에게 허물이 있다면 그 책임은 전부 나에게 있으나 이제부터는 그 책임이 전부 그대들에게 있다...”하시면서 오관실행을 통한 스스로의 신행을 강조하셨다.

15. 주문

주문은 대신사께서 논학문에 자세히 설명해 주신대로 한울님을 모시고, 위하는 글이며, 무극대도가 담겨있는 글이니 천도교 수행의 시작과 완성이 주문을 공부하는데 있다고 하겠다. 주문을 읽는 방법은 소리내서 읽는 현송(顯誦)과 소리없이 읽는 묵송(?誦), 주문의 뜻을 생각으로 읽는 염송(念誦)이 있다. 현송은 氣化가 주로 이루어 지니 한울님 큰기운을 처음 접하는 초학자의 강령공부나 기운공부에 적합하고, 묵송은 心和가 주가 되니 본래의 내모습이 무엇인가 우주의 근본은 무엇인가를 느끼기 위해 고요하고 깊게 침잠하는 성품공부가 주가 되겠다. 그러므로 현송과 묵송을 항상 치우치지 않게 함께 공부해야 진리를 공부하면서 현실도 또한 일탈하지 않는 참된 도를 행할 수 있을 것이다.

관변기록에 다음과 같은 대화가 실려있다. 어떤 제자가 배운 주문을 口讀하지 않고 마음속으로 읽는 것이 어떠하냐고 물었다. 수운은 “心讀할 뿐이고 구독하지 않으려면 차라리 배우지 않는 것이 좋다.”라고 아주 잘라 대답하였다.

모든 종교의 수행에서 진언이나 주문 또는 기도문을 외우는 것이 보편적인 수행법으로 널리 활용되고 있다. 그런데 천도교의 주문수련의 경우 강령의 체험이 빨라서 처음보는 사람들은 놀라거나 거부감을 갖기도 한다.

강령의 체험 또한 기도하는사람의 성격이나 경험, 처해있는 상황등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다. 몸과 마음이 편안하고 차분한 상태에선 마음이 편안하고 환하게 열리는 듯한 체험으로 나타날 수 있고, 지난 허물이 떠올라 참회하는 마음이 저절로 생기면서 통곡하는사람도 있고, 닫혔던 마음이 탁트이는 상쾌함에 덩실덩실 춤을 추는 사람도 있다. 또한 몸에 병이 있는 사람은 막혔던 기혈이 트이고 순환되는 체험을 하기도 하는등 일정한 정형은 없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그러한 마음의 열림을 잊지않고 지켜나가는 것이다.

16. 심고

심고는 우리의 삶이요 생활이어야 한다. 한울님의 기운으로 살아가므로 모든 것을 감사하고 되돌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심고 또한 매매사사 구체적이고 자신의 사는 내용 그대로가 심고의 내용이 되겠다. 그래서 해월신사님께서 “잘 때 ‘잡니다’ 고하고, 일어날 때 ‘일어납니다’ 고하고, 물길러갈 때 ‘물길러갑니다’ 고하고... 매매사사를 한울님께 고하면 병에 안걸리고, 간질과 풍병이라도 나으리니... 병도 나으려니와 우선 대도를 속히 통할 것이니...” 하신 것이다.

우리가 보통 심고할 때 “한울님 스승님 감응하옵소서” 하고 시작한다. 이렇게 한울님과 스승님을 함께 부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한울님과 스승님의 은덕을 항상 잊지 않고 생각함으로써 그 은혜에 보답한다는 의미에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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